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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클볼 이야기

 장을 보고 집에 돌아와 책을 펴고 공부하려다 전부터 써봐야지 하고 생각했던 이야기를 쓰려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공모전도 어제 끝났겠다 좀 진득하니 시간을 들여 사진도 찾아 넣고 글도 쓰기 좋은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너클볼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너클볼은 손톱 끝으로 공을 잡고, 던질 때 볼의 회전을 최소화시켜 공의 실밥으로 인해 기류를 불규칙하게 만들어 공의 궤적이 예측불허하게 되는 구질입니다. 야구계 최고의 마구로 불립니다. 아래 그림을 보시면 이해가 빠르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공기의 흐름이 불규칙해지면서 볼의 궤적 역시 매우 불규칙하게 변합니다. 때문에 60-80 마일 정도의 느린 공임에도 타자들이 손을 대지 못하고 헛스윙을 연발합니다. 볼을 받는 포수에게도, 판정을 내리는 심판에게도 어려운 공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압도적인 구위나 칼같은 제구력이 없는 아리랑 볼로 최고의 타자들을 농락할 수 있다는 것이 너클볼의 최대 매력입니다. 그러나 이 불규칙함은 치명적인 독이기도 합니다. 투수조차도 그 궤적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워낙 제멋대로 움직이는 공이다보니 제대로 제구한다는 게 정말 어렵습니다. 잘 던져지는 날에는 무적의 공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그냥 얻어맞기 좋은 배팅볼이 됩니다. 거기에 더하여 날씨, 습도 등의 영향을 받는 건 물론이거니와 손톱으로 공을 잡고 던지는 것이기 때문에 손톱이 조금만 문제가 있어도 투구 과정 전체에 이상이 가는 등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구질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리스크가 매우 큰 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너클볼은 100년이 넘는 야구의 역사에서 투수들에게 그리 환영받는 공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통산 300승의 필 니크로, 4년 연속 20승을 돌파하며 사이영상 2위까지 올랐던 에릭 윌버, 통산 200승을 작성하고 2011년을 끝으로 은퇴한 팀 웨이크필드 등 위대한 너클볼 투수들이 있었으나 매우 드물었죠.


 그러나 2012년을 돌아보는 지금, 야구계 최고의 핫 키워드는 단연 이 너클볼이었습니다. 

 1974년생의 로버트 디키는 2007년까지 메이저리그에서 고작 16승 11패를 기록한 이름없는 투수였습니다. 2007 시즌이 끝나고는 삼성 라이온즈에서 오퍼가 오기도 했습니다. 당시 30만 달러의 연봉을 제시받았는데 디키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는 그가 지난 5년 간 받던 연봉을 상회하는 금액이었다 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후 너클볼을 장착했고, 38살을 맞이한 올해, 20승 200이닝 200탈삼진이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내면서(34경기 20승6패 233.2이닝 230삼진/54볼넷 2.73/1.05/.226), 너클볼러로서는 사상 최초로 사이영상을 거머쥐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디키는 기존의 너클볼러들에 비해 빠른 구속과 정교한 제구력을 앞세워 타자들을 공략했습니다. 그의 너클볼이 한참 춤을 추던 8월에는 웨이크필드와 디키를 중심으로 너클볼러의 애환과 드라마를 그려낸 다큐멘터리 Knuckleball이 개봉하여 야구팬들 사이에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디키의 투구영상. 종잡을 수 없는 궤적에 타자의 배트들이 덧없이 나갑니다.

 3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에 선수로서 전성기를 맞이한 디키의 성공은 확실히 드라마틱하지만, 다른 너클볼러에게서도 종종 비슷한 역전 드라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팀 웨이크필드는 93년, 24게임 6승 11패 128.1이닝 ERA 5.61 WHIP 1.71이라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고 피츠버그에서 쫓겨났지만, 보스턴에 입단한 뒤 선배 너클볼러 필 니크로의 과외를 받고 1995년 16승 8패 195.1이닝 ERA 2.95 WHIP 1.18이라는 준수한 스탯으로 부활했습니다. 그 이후 부침을 겪기도 했으나 41살의 나이에 17승을 기록하는 등  45살까지 활약하고 은퇴하였습니다. 메이저리그 통산 200승을 기록했으며, 특히 보스턴에서 기록한 186승은 사이 영, '로켓맨' 로저 클레멘스의 192승에 이은 보스턴 역대 팀 최다승 3위의 대기록이었습니다. 그는 대단치 않은 투수가 될 뻔했지만, 너클볼 덕에 보스턴 레드삭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필 니크로 역시 48세까지 선수로 활약했으니 너클볼이야말로 선수생명 연장의 묘약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튼 평범한 선수들에게 역전과 부활의 기회를 만들어준다는 것은 너클볼이 갖는 매력이라 생각합니다. 아롤디스 채프먼이 100마일을 넘나드는 공을 자유자재로 던지는 시대에 70마일대의 공을 갖고 타자들을 농락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매력이 있죠. 물론 타자들로서는 분통 터지는 일이겠지만요.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우리나라 역시 드물지만 너클볼을 던진다고 하는 투수들이 있었습니다. 엘지 트윈스의 용병투수였던 옥스프링이 너클볼을 던졌고 마일영 역시 군대에서 독학한 너클볼을 사용하곤 했습니다. (이들의 공은 너클볼이 아닌 팜볼에 가깝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선수만 너클볼을 던질 줄 아는 건 아닙니다. 고양 원더스의 허민 구단주는 스스로를 너클볼러라고 소개할 정도로 야구를 사랑합니다. 필 니크로를 초청해서 그에게서 직접 너클볼을 전수받았죠. 프로야구 팀이 아님에도 '프로야구 사관학교'를 표방하며 후한 대우로 김성근 감독을 데려와 팀을 육성하는 등 야구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국내 야구계에 새바람을 몰고 있습니다. 구단을 운영하는 모습 역시 너클볼러와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허민 고양 원더스 구단주와 김성근 감독. 한국 야구계의 두 괴짜는 같은 꿈을 꾸고 있습니다.(사진출처: 중앙포토)

 너클볼의 바람은 야구계를 넘어 음악계까지 불어닥쳤습니다. 엘지 트윈스의 골수 팬으로 유명했던 뮤지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2주기 앨범이 발매되었습니다. 그의 여동생이 작업하고 미발표곡을 수록한 이 추모앨범의 타이틀 역시 '너클볼컴플렉스'였습니다.


 그는 세련된 음악을 만드는 뮤지션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직선적인 곡 안에 진정성을 담은 '돌직구'를 쉴새없이 뿌려대는 훌륭한 아티스트였습니다. 이 앨범에서 그는 너클볼을 인생에 비유하며 '느리고 우아하게, 찬란하게 빛나는' 너클볼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늘 찌질거리는 노랫말을 쓰던 그의 모습과는 조금 다릅니다. 어쩌면 그 역시 멋지게 일어났던 웨이크필드처럼(디키는 그가 떠나고 난 뒤 떴으니) 비록 느리지만, 비웃음을 당하지만 그럼에도 꿋꿋하게 일어나는 드라마를 쓰고 싶었던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더 이상 우리 곁에 없지만 하늘에서 디키의 성공신화를 보고 아주 기뻐하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바로 저런 거였다고 웃으며 말입니다.


덧글

  • 언더스톤 2012/12/17 00:38 # 삭제 답글

    너클볼의 최대장점은 쿠세를 읽지 못한다는거같습니다.

    던지는놈도 받는놈도 어디로튈지 모르는데 치는놈이 알턱이 없죠

    바깥쪽 볼을 던질거같은 쿠세가 나와서 바깥쪽대비하는데 바람타고 안쪽스트존으로 들어가버린다던가 하는게 빈번히 일어나다보니 헛스윙해놓고도 억울한표정짓는 타자가 매우 많습니다.

    한국은 아무래도 손가락길이나 체격문제때문에 너클볼러가 많이 없죠...

    대신에 언더/사이드암이 비교적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정대현 선수가 있죠. 1번부터 9번까지 홈런머신인 쿠바대표팀상대로 병살타로 투아웃잡던 위엄...
  • 원주시민 2012/12/17 14:01 #

    말씀해주신 대로 우리나라 투수들은 하드웨어의 한계가 있어 너클볼에 적합하지 않고, 매력적인 잠수함들도 많죠. 김병현 선수와 임창용 선수도 떠오릅니다ㅎㅎ정대현 선수가 볼티모어 갔으면 밥값은 해줬으리라 생각하는데 이젠 창용이 형을 믿어봐야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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